종교라고 하면 아주 오래 전부터 있어온 단어 같지만, 저것이 우리 말에 생긴 것은 100년과 조금 더 오래 전 정도이다. 종교라는 말의 어원은 분명히 religion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기독교가 이 땅에 전파될 때 선교사들이 독점하여 사용한 언어이다. 새로운 말을 만들어가면서 자신들을 규정지으려 했다는 것은 그 말이 꼭 필요했다는 것인데, 그 필요는 천주교와 비교해보면 잘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천주교 초기의 역사는 한 마디로 「피로 물든 시간」으로, 조정의 대대적인 숙청에 의해 수많은 교인들이 믿음값으로 자신의 목을 내놓아야만 했다. 조상에게 제사도 지내지 않는 불경한 무리들이기에 인정받을 수 없었다고 할 수도 있는데,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만물의 창조자이자 전지전능한 신을 규정하면 왕의 권력도 어쩔 수 없이 거기에 포섭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 전례를 알기 때문인지 기독교는 일찌감치 종교라는 말로 자신들을 둘러싸서 자신들의 영역은 정치와 하등 관계가 없음을 주장했다. 이외에 기독교가 가진 많은 것들을 종교의 특성으로 규정지으며 종교와 종교 아닌 것들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종교학계에서 종교학 입문자들을 대상으로 던지는 질문인 「유교도 종교인가」는 이것과 아주 깊은 연관이 있다. 각설하고, 자신들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 선교사들의 논리였으며 그래서 기독교는 조정의 탄압을 피할 수 있었다. 이것 자체는 별 문제가 아니나 이후로 우리나라의 기독교 모습을 보면 세상이 돌아가는 것에 너무도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왔다. 아니, 어느 순간부터는 권력의 개가 되었다. 그들은 언제나 지도자들을 따랐으며 영악할 정도로 자신의 믿음을 굽히는 모습을 자주 보여줬다. 일제탄압 시기에는 자랑스럽게 천황을 찬양하며 신사에 참배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비리의 온상이었다. 민주화 운동 당시 소위 민주열사들의 마지막 보루는 명동성당이었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랴. 순복음교회의 조목사가 전두환을 위해 축도를 올렸다는 건 아는 사람으로서는 이가 갈릴 이야기. 물론 보기 역겨울 정도의 추태는 불교 쪽도 마찬가지였으나 그것이 기독교의 부패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그리고 「지도자를 위해 기도하라.」 그래서 이 땅의 기독교는 참으로 권력에 순종적이었다. 세상이 몇 번씩 바뀌었으나 그때마다 주인을 바꿔가며 아부하는 모습은 경이로운 지경에 도달했다. 그리고 드디어 국내에서 포화지경에 닿은 지금에 와서는 카이사르의 것도 내것이고 내가 지도자이니 나를 위해 기도하라고 나서기 시작한다. 기독교를 둘러싼 환경이 바뀌었고 그에 따라 기독교도 같이 변해왔으나, 그들의 원동력 하나만큼은 변하지 않았으니 바로 속물적 근성이다. 끊임없이 이명박을 찬양하며 촛불집회에 나간 이들을 사탄의 유혹에 빠진 마귀새끼들이라고 저주하는, 기독당을 만들고 국회를 점거하여 교회에 나가지 않는 년놈들은 전부에 감옥에 쳐넣어버리겠다고 선포하는 대형교회의 목사들을 움직이는 힘은 똑같다는 것이다.
강자에게는 비굴하고 비겁하나 동시에 약자에게는 한없이 폭력적인 그들의 성향 덕분에 이 땅의 기독교가 세계에 유래가 없는 번성을 이루었을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니 하나님의 원대하신 뜻은 얄팍한 사람의 지성과 양심으로는 헤아릴 수 없다는 그들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변화가 필요할 때는 뒤로 물러서있거나 오히려 살찐 돼지들을 옹호하고, 그러다가 세상이 뒤집어지면 제일 먼저 태도를 바꿔 단물을 빨아먹는 그들의 모습은 너무 비겁하다.
공의의 하나님이 무슨 의미인가. 믿는 자들의 안락을 위해서는 믿지 않는 자들을 모조리 짓밟아버려야 한다는 정의 이외의 다른 의미가 있는가. 믿는 자들의 안락을 위해서는 양심마저 버리고 개돼지처럼 움직여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겠지. 하나님이라면 타인을 위해 괴로워하는 이들을 안으시고 이들이 기쁘게 바라볼 수 있는 세상을 만드실 것이 아닌가, 찬양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이시라면.
처음 생각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아버린 종교라는 단어를 보며, 이제 탄압받지 않아도 되는 지금의 상황에 감사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 감사함에 쓴맛이 남는 것은 어째서였을까.
그 전례를 알기 때문인지 기독교는 일찌감치 종교라는 말로 자신들을 둘러싸서 자신들의 영역은 정치와 하등 관계가 없음을 주장했다. 이외에 기독교가 가진 많은 것들을 종교의 특성으로 규정지으며 종교와 종교 아닌 것들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종교학계에서 종교학 입문자들을 대상으로 던지는 질문인 「유교도 종교인가」는 이것과 아주 깊은 연관이 있다. 각설하고, 자신들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 선교사들의 논리였으며 그래서 기독교는 조정의 탄압을 피할 수 있었다. 이것 자체는 별 문제가 아니나 이후로 우리나라의 기독교 모습을 보면 세상이 돌아가는 것에 너무도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왔다. 아니, 어느 순간부터는 권력의 개가 되었다. 그들은 언제나 지도자들을 따랐으며 영악할 정도로 자신의 믿음을 굽히는 모습을 자주 보여줬다. 일제탄압 시기에는 자랑스럽게 천황을 찬양하며 신사에 참배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비리의 온상이었다. 민주화 운동 당시 소위 민주열사들의 마지막 보루는 명동성당이었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랴. 순복음교회의 조목사가 전두환을 위해 축도를 올렸다는 건 아는 사람으로서는 이가 갈릴 이야기. 물론 보기 역겨울 정도의 추태는 불교 쪽도 마찬가지였으나 그것이 기독교의 부패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그리고 「지도자를 위해 기도하라.」 그래서 이 땅의 기독교는 참으로 권력에 순종적이었다. 세상이 몇 번씩 바뀌었으나 그때마다 주인을 바꿔가며 아부하는 모습은 경이로운 지경에 도달했다. 그리고 드디어 국내에서 포화지경에 닿은 지금에 와서는 카이사르의 것도 내것이고 내가 지도자이니 나를 위해 기도하라고 나서기 시작한다. 기독교를 둘러싼 환경이 바뀌었고 그에 따라 기독교도 같이 변해왔으나, 그들의 원동력 하나만큼은 변하지 않았으니 바로 속물적 근성이다. 끊임없이 이명박을 찬양하며 촛불집회에 나간 이들을 사탄의 유혹에 빠진 마귀새끼들이라고 저주하는, 기독당을 만들고 국회를 점거하여 교회에 나가지 않는 년놈들은 전부에 감옥에 쳐넣어버리겠다고 선포하는 대형교회의 목사들을 움직이는 힘은 똑같다는 것이다.
강자에게는 비굴하고 비겁하나 동시에 약자에게는 한없이 폭력적인 그들의 성향 덕분에 이 땅의 기독교가 세계에 유래가 없는 번성을 이루었을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니 하나님의 원대하신 뜻은 얄팍한 사람의 지성과 양심으로는 헤아릴 수 없다는 그들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변화가 필요할 때는 뒤로 물러서있거나 오히려 살찐 돼지들을 옹호하고, 그러다가 세상이 뒤집어지면 제일 먼저 태도를 바꿔 단물을 빨아먹는 그들의 모습은 너무 비겁하다.
공의의 하나님이 무슨 의미인가. 믿는 자들의 안락을 위해서는 믿지 않는 자들을 모조리 짓밟아버려야 한다는 정의 이외의 다른 의미가 있는가. 믿는 자들의 안락을 위해서는 양심마저 버리고 개돼지처럼 움직여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겠지. 하나님이라면 타인을 위해 괴로워하는 이들을 안으시고 이들이 기쁘게 바라볼 수 있는 세상을 만드실 것이 아닌가, 찬양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이시라면.
처음 생각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아버린 종교라는 단어를 보며, 이제 탄압받지 않아도 되는 지금의 상황에 감사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 감사함에 쓴맛이 남는 것은 어째서였을까.



